“조선족 독립운동가들이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중국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더군요.
민족주의자인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전투를 두고는 한국과 일본, 중국 해석이 제각각이고요.
1930년대 중국에서 (친일반공 조직인) 민생단 단원으로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들도 많았어요.
세계적인 문명교류학자이자민족주의자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정수일 선생은 지난 2월 24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수일 선생의 부인 윤순희 여사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새로 발견한 북녘 부인에게 보낸 시를 낭송했다.
민족주의자는 아직도 북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표하지만 이런 감정을 더는 진심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냉전 기간 서독인들은 민족, 동족에 대한 이야기를 기피했지만 때가 됐을 때 통일을 위해 높은 세금을 지불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반면 한국민족주의자는.
이건창 선생은 갑오경장 후 일체 관직을 버리고 척양척왜민족주의자의 삶을 살았으며, 강화학파를 계승하였다.
이건창 선생의 묘소는 비석도 문인석도 없는, 그냥 필부의 무덤처럼 보였다.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시대, 강화학파는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친일파의 재등용, 공산당 및 남로당의 배제, 중도좌익을 포함해 혁명적민족주의자에 대한 억제, 친미 부르주아의 중용, 강제공출과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의 수립은 해방 후 한민족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편향적인 조치들이었다.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대한 대규모 항의로서 1946년 9월 총파업.
히틀러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해 한국인들이 히틀러에 대해 흔히 오해하는 게 “히틀러는 독일민족주의자였다”는 생각이다.
다음 문장을 읽고도 과연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묻고 싶다.
(나치가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이전에는 공공연하게 내보일 수 없었던) 독일 민족에 대한 일반적 증오(주: 1923년.
왜곡된 정치를 개혁하고 경제적 안전에 투자하면 백인민족주의자들이 동조자를 확보하는 일은 어려워질 것이다.
인종적 구성에 비추어 미국은 백인들만의 국가가 아니라 다인종 민주국가로 나아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되레 후퇴하고 있다.
당파적 이해가 엇갈려 당분간 이를 개선하기도 쉽지 않아.
스파스키는 공산당 입당을 거부한 러시아 구체제민족주의자로서 75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골수 반유대 인종주의자였던 피셔는 “유대인의 음모에 놀아나는 미국과 유엔”을 비난하며 조국을 등졌다.
요컨대 둘은 20세기 냉전 체스 판의 ‘폰’이 되기를 거부한 작은 거스러미였다.
히틀러에 공감하는 독일민족주의자로, 히틀러가 4시간에 걸쳐 자신의 반역죄를 합리화하는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도록 했다.
선고도 반역죄 처벌을 위한 공화국수호법의 최저 형량(징역 5년)에 그쳤다.
그것도 몇 달 후에는 형 집행을 유예한다는 단서까지 붙여 히틀러가 8개월 남짓 복역하고 풀려나도록 했다.
반민족주의자는 처벌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자들이 오히려 처벌되는 그러한 반민특위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 내란 사태에 협조한 자들에겐 조금의 온정도 베풀지 않고 법을 집행해야 한다.
그 첫 순서가 바로 '국민의힘' 정당해산이다.
아울러 이번 내란을 기획하고 협조하며 동조한 모든.

